한국사검정능력시험 고급 43회 해설 (31번~40번)

답 :

(가) 흥선 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서원 개혁 정책을 참조하여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백성을 수탈하는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그래서 사액 서원 중 47개소만 남기고 만동묘와 600여개의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또 다른 업적으로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사창제를 실시했고

서구 열강의 통상 수교 거부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① 나선 정벌을 위해 조총 부대를 파견 - 효종

② 청과의 경계를 정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움 - 숙종

③ 신유박해로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처형 - 순조

④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 - 정조

 

 

 

 

 

답 :

(가) 평양

고구려의 안학궁 터와 S자형의 대동강으로 말미암아 평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6~1947년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된 곳은 최초의 서양식 건축 기법으로 지어진

서울의 덕수궁 석조전입니다.

 

② 안창호가 민족 교육을 위해 대성 학교를 설립 - 평양

③ 고무 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노동 쟁의를 전개 - 평양

④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관민들에 의해 불태워짐 - 평양

⑤ 조만식 등을 중심으로 조선 물산 장려회가 결성됨 - 평양

 

 

 

 

 

답 :

강화도 조약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맺은 조약은 강화도 조약입니다.

조약의 한국측 대표는 신헌, 일본측 대표는 구로다 기요타카입니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의의가 있지만,

부산 외 2곳을 개항하고 일본에 영사재판권과 해안측량권 등을 내준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① 방곡령을 선포할 수 있는 조항을 명시 - 조일통상장정

② 메가타가 재정 고문으로 부임하는 근거가 됨 - 제1차 한일 협약

③ 외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처음으로 규정 - 조미수호통상조약

⑤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여 부당성을 알리고자 함 - 을사조약

 

 

 

 

 

답 :

(가) 강화도 조약 후 고종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며, 통리기무아문 설치,

기존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2영 통합, 별기군 신설 등을 진행했습니다.  - 1881년

 

(나)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구식 군대 군인들은 차별받았고 이에 폭발한 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켰습니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흥선 대원군은 별기군을 폐지하고 기존의 5영군제로 복귀시켰습니다. - 1882년

(다) 임오군란 후 소극적인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국 낙성연회를 이용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 1884년 

 

(라) 갑신정변 이후 조선 주변의 청, 일본, 러시아, 영국 등의 세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조선에 다른 나라 세력이 들어가는 것을 염려한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습니다. - 1885년

 

 

 

 

 

답 :

(가) 영선사

(나) 보빙사

영선사 김윤식은 38명의 학생과 기술자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서양의 근대식 무기 제조 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배웠고

 이후 귀국하여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이 세워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의 보빙사는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박람회, 병원, 신문사 등을 시찰했습니다.

 

① 귀국할 때 조선 책략을 가지고 들어감 - 수신사

③ 보고 들은 내용을 해동제국기로 남김 - 통신사

④ 해국도지, 영환지략을 들여와 국내에 소개 - 연행사

⑤ 암행어사 형태로 비밀리에 파견됨 - 수신사

 

 

 

 

 

답 :

(가) 전주 화약 (1894년 6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고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한 탄압에 저항하여 재봉기했습니다. 이후 황토현, 황룡촌 전투에서 정부군에 승리했고

점차 대치하다가 전주에서 정부와 농민군이 화약을 맺었습니다.

 

②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삼례 집회가 개최됨 - 1892~1893년

③ 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에서 승리 - 1894년 5월

④ 사태 수습을 위해 이용태가 안핵사로 파견됨 - 1894년 4월

⑤ 전봉준이 농민들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 - 1894년 2월

 

 

 

 

 

답 :

을미의병

을미의병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계기로 일어난 최초의 의병이며,

유인석, 이소응등의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났습니다.

 

② 민종식이 이끈 부대가 홍주성을 점령 - 을사의병

③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것을 요구 - 정미의병

④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 - 13도의 의병

⑤ 조선 총독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제출하고자 함 - 독립 의군부

 

 

 

 

 

답 :

(가) 독립협회

개화파인 서재필 등은 독립협회를 창립했고 이후 독립문 건설 주도,

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 관민공동회 개최 등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를 추구하여 조병식 등의 보수 세력과 대립했고

공화제를 추진한다는 모함을 받았습니다.  

 

 

 

 

 

답 :

(가) 조선의용대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김원봉 등의 조선 혁명당은 공산주의 정당과 연합하여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로 이후 조선 독립 동맹 및 조선의용군을 결성하는데 기여했습니다.

 

① 총사령 양세봉의 지휘 아래 활동 - 조선혁명군

② 미국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 - 한국광복군

③ 쌍성보 전투에서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 - 한국독립군

④ 간도 참변 이루 조직을 정비하고 자유시로 이동 - 대한독립군단

 

 

 

 

 

답 :

4차 개헌 이후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사천성 충칭에 정착하고 주석 중심의 주석중심제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그 이후 1941년에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했습니다.

 

①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 - 1919년

③ 무장 투쟁을 위해 육군 주만 참의부를 조직 - 1924년

④ 국민 대표 회의를 열어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 - 1923년

⑤ 임시 사료 편찬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 -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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